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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일기

코털

by 노무사 장씨 2020. 10. 7.

마지막 블로그 글을 쓴지 한 달이 지났다.

 

이번에는 시간이 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일매일 '오늘은 글을 써야지, 그래 쓰자'를 되뇌었다.

 

그러나 한 달이 넘게 지났다. 한 달이 지났다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한 달은 지나버렸다. 다시 또 나태했다. 

 

 

 

나는 코털이 빨리 자란다. 코털이라고 하면 인중에 나는 콧수염처럼 근사한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게서 빨리 자라나는 털은 콧 ‘속’의 털이다.

 

의도치 않게 빨리 자라나는 이 털은 조금이라도 관심을 덜 주면 코를 비집고 나와 밖으로 삐져나온다. 내 존재감을 알아달라는 듯이. 마치 해에게서 사랑을 갈구하는 해바라기 같이.

 

 

 

재택근무를 맞이하야, 거울을 유심히 봤다. 역시나, 관심을 주지 않았던 코털들이 코를 헤집고 나와있었다. 정말이지 내 의지는 하나도 없이 자기 혼자서들 튀어나온다.

 

코털 가위를 들었다. 코털들은 사랑을 갈구하나, 나는 무지막지한 형벌을 내린다. 금색의 스테인리스 코털가위는 무려 6년 전 부산 영도의 다이소에서 산 것이지만 내가 이사하는 곳곳마다 따라오더니 지금에 이르렀다. 그만큼 코털과 나의 관계는 끈끈하다.

 

스테인리스 가위로 싹뚝싹뚝 코털을 잘라낸다. 금색의 번쩍 빛나는 스테인리스 가위 앞에서는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영락없이 잘려나간다.

 

그런데, 오늘은 실수를 했다. 재택 근무로 시간이 조금 여유로웠는지 안보이는 곳까지 깔끔하게 자른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콧 속에 상처를 낸 모양이다. 하루종일 콧 속이 불편하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코털과 나의 관계를 조금 부풀렸다. 평소 코털을 자주 신경쓰기야 하지만 글로 남길 정도는 아닌데, 오늘따라 코가 시큰한 것이 더욱 생각나게 하니, 코털의 구애가 통한 것인가 늦은 밤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코털이 구애를 한지는 약 10년 쯤 되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청소년기에는 코털이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었고, 날 본격적으로 괴롭혔던 건 군대에 입대한 시기부터이니 약 10년이 얼추 된다.

 

10년의 세월은 길었다. 코털이 길어서 여자친구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고, 중요한 자리를 잘 치르고 나서 거울을 보니 삐져나온 코털에 식은 땀이 나기도 했고, 소개팅 자리에 나가서 잠깐 화장실을 갔다가 코털을 보고 놀래서 뽑아내기도 했다. 코털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밉진 않다. 

 

화가 나지 않는다. 조금 더 섬세하게 다루어야 겠다. 삐져나온 코털을 자르다가 콧 속에 난 상처 덕에 코털에 다시 애착이 생기다니 아이러니다.

 

 

(이 글은 2020년 9월 어느 날에 쓰여졌습니다, 게으른 덕에 이제야 올리는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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